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 희 경
1.
봄눈 (May 3)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처음 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때늦은 봄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카펫이 깔린 이태리 식당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곳이 내가 알던 곳과는
다른 세계임을 알았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병과 촛대가 놓였고, 부유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사람들이 양식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나누는 나직한 대화가
실내 공기를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창가의 예약석으로 안내되었다. 웨이터가 아버지의 고급 바바리코트와 함께 군데군데 솜이 뭉친 내
낡은 파카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마주 앉은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 등 뒤의 벽에서 희미하게 부분 조명을 받고
있는 커다란 그림에만 눈길을 주었다.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실내 공기가 훈훈하여 나의 접힌
목주름 사이로 곧 땀이 배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었으니 엄마한테 더 잘해야 한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한테
전화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고. 그 말은 약간 거짓말처럼 들렸다. 음식이 날라져 오자 나는 얼굴을 숙이고 먹는 일에만 열심인 척했다. 아버지가
새우에 소스를 친 다음 그것을 내 접시로 옮겨주며 다시 말했다. 먹성이 좋구나. 걱정 마라. 어른이 되면 살은 저절로 빠지니까. 아버지도 네 나이
때는 별명이 찐빵이었어. 나는 그것도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음식을 다 먹은 뒤 접시가 치워지자 다시 눈 둘 데가 없어진 나는 또 그림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 시선을 좇아서 아버지가 자신의 등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입가에 품위 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비너스란다.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나는 장면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그렇게 슬퍼졌을까. 초록색이 도는 우윳빛의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러운 아름다운 얼굴. 가냘픈 알몸을 휘감은 채 바람에 날리고 있는 긴 금발의 머리카락과 커다랗게 열린 조개껍질을 밟고 선 무방비해 보이는 하얀
맨발.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는 눈 속 깊은 곳의 그 신비스러운 슬픔 때문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눈에 가득 고이는 눈물을 본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침통하게 말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날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걸음이 뒤처질 때마다 아버지는 잠깐씩 멈춰 서서 기다려주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내 몸집이 둔해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오해는 나에게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뚱뚱한 꼬마였던 나는 언제나 뭔가 불만스럽고
또 심술궂게 보였지만 그러나 단지 수줍었던 것뿐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는 날에는 내가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항상 슬픈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아버지는 특히 내가 뚱뚱한 아이라는 걸 가장 못마땅해했을 것만 같았다. 순진하고 영민한 아이와 함께라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만 심술궂거나 아둔해 보이는 뚱뚱한 아이는 자신의 실수와 한때의 어리석음을 환기시켜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2.
비너스 (May 10)
1) 2) 내 돈으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내 방 벽에 비너스의 그림을 걸었다. 사춘기의 내 친구들은 여인의 알몸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포르노 브로마이드에 대한 변형된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뚱뚱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섬세함과 감수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일종의 보상 심리로 클래식 장르에 집착한다고 말한 것은 B였다. 그러나 침대에서
애인 마르스를 맞이하는 관능적인 비너스나 활을 든 에로스와 함께 있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비너스는 나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다른 선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듯 우아한 균형미를 내뿜는 밀로의 비너스 역시 내 눈에는 미술 시간의 데생 과제물로만 보였다. 나에게 비너스란 오직 보티첼리의
비너스였다.
3) 4) 그날 친구들이 B의 집에 간 것은 부모가
유럽 여행길에 사온 위스키를 훔쳐 마시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물로 희석시켜놓은 인삼주병과 양주병은 B의 집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B가
비싼 술이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는 바람에 새 양주를 조금밖에 축낼 수가 없었다. B의 아버지가 서재에 두고 마시는 위스키를 약간만 더 마시기로
작당하고 내가 병을 가지러 갔다. B의 아버지 서재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였다. 먼지 쌓인 책들과 비밀스러운 적막과 공기 중에 떠도는 근친의 희미한
체취. 어쩌면 B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책장에 있는 술병을 찾아서 들고 나오던 나는 책상 위의 책에 흘끗 눈길을
주었다. B의 아버지가 읽는 책이 무엇인지는 언제나 나의 관심사였다. 책상 위에는 최근 여행지에서 사온 듯한 박물관의 도록이 펼쳐져 있었다.
5) 6) 엄청나게 비만한 여인의 석상이었다. 허리를
빙 둘러 붙어 있는 늘어진 살덩이는 마치 두터운 솜 포대기를 친친 감아 아기를 업고 있는 것 같았다. 돌확만 한 젖가슴을 지탱하기 위해 몸은 앞으로
쏠렸는데 그것을 항아리처럼 보이는 뱃살과 대들보 굵기의 짧은 종아리가 안정되게 받쳐주고 있었다. 팔다리나 목과 허리 등은 구별이 있을 수 없었고
얼굴에는 물론 생김새라고 할 것이 없었다. 울퉁불퉁 제멋대로 굴려 만든 눈사람에게 코끼리의 다리를 붙였다고나 할까. 그 여인의 이름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였다. 사진 설명에는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 소장이며 2만여 년 전 빙하기 때 만들어진 돌 비너스라고 적혀 있었다.
7) 8) 나는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책상 한켠에 술병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도록에서 그 페이지를 찢어내기 시작했다. 두 번쯤 접으니 바지 주머니에 알맞게
들어갔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2만 년이란 시간에 대해 처음으로 뭔가 미미하게나마 느낌이 왔기 때문일까.
상투적으로 표현해서 내 몸속에 든 원시의 시간을 느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어떤 야유나 냉소 비슷한 감정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느낌은
내 손안의 술병을 향해 내지르는 친구들의 환호 속에 금방 묻혀버렸다. 집에 돌아와 바지를 갈아입으면서야 나는 주머니 속의 여인을 기억해냈다. 술기운이
퍼지면서 무척 졸렸으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빼 아무렇게나 그 갈피에 집어넣은 뒤에는 곧장 침대로 가야 했다. 몸을 던지자
침대가 뒤틀리듯 신음을 토해냈다.
9) 10) 아마 그 무렵이 내 체중의 최대 전성기였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체육 시간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날 정도이다. 나는 내 생애 최초로 사진을 훔친 여인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일요일 새벽 목욕탕 저울 앞에 섰을 때 이따금 그녀가 생각났었다. 그때마다, 비너스, 제발 나를 축복하지 마, 너의 풍요와
다산을 내게서 거두어줘, 그렇게 중얼거리며 저울을 내려오곤 했던 것이다. 책장을 모조리 뒤져서 어떤 책의 갈피엔가 들었을 여인의 사진을 찾아보고
싶어질 만큼 자주 생각났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학생이 된 뒤, 나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내가 읽어온 거의 모든 책을 책장에 꽂혀 있던 순서대로
묶어서 헌책방에 팔아버렸다.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이사 통에 없어졌다.
11) 12)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또 한
번 나를 불러내 고급 식당에 데려갔었지만 대학생 때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내가 커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에 하는 말이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 어머니는 더 이상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가 성인이 됨으로써,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훨씬 자유로워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바로 행복을 약속해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엄마한테 더 잘해야 한다. 만약 아버지를 만났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인 셈이다.
3.
일요일의 전화 (May 17)
Group 1
1) 나 의 서른다섯번째 생일은 일요일이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돌아와 전날 밤 불려놓았던 미역으로 국을 끓였다. 설거지를 마친 어머니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나는 생일을 기념할 겸 다이어트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마치 그 말을 동면을 앞둔 곰한테서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년 이래 내가 뚱뚱한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이 결코 짧은 건 아니었다.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인간의 자기애는 아무리 열악한 것이라 해도 주어진 조건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으며 그 삶을
합리화하기 마련이다. 삼십여 년 동안 내가 비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던 만큼 어머니가 수상쩍다는 듯 한참이나 나를 훑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갑자기 다이어트 따위를 결심한 이유를 발견해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마지못한 어조로 이렇게 한마디 던졌다. 이제 빨랫대가
비좁지 않아 좋겠구나. 두 식구뿐인데도 빨래 널 자리가 부족한 것은 내 옷이 워낙 대형 사이즈이기 때문이라고 어머니는 불평하곤 했다. 자신이 빨래를
자주 하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가만 있자, 네가 줄어들면 집이 더 넓어지려나. 어머니는 오랜 세월 굳어진 지치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집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2) 케이블 방송에서는 토크쇼를 재방송하고 있었다.
화면에 출연자의 얼굴이 나타나자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앉았다. 쌍둥이처럼 똑같이 흰 옷을 차려 입은 미소년 둘이 바람머리를 흔들며 연신
화면 가득 향기가 퍼져나갈 듯한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는 그 댄스 그룹의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이었다. 그 둘이 나올 때마다 어머니는 한결같이 이렇게 물었다. 얘, 어느 쪽이 현중이고 어느 쪽이 형준이랬지? 어머니는 틀리는지 맞는지는
구별하지 못했지만 정확하지 않은 대답이란 것은 어김없이 눈치를 챘다. 애초부터 내게서 성의 있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불평해도
나의 무뚝뚝한 성격이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혼잣말을 대화처럼 주고받는 법을 터득한 지 오래였다. 셋이라면 차라리 구별이 쉽겠는데 둘이라
더 어려워. 꼭 우회전하고 좌회전처럼 말야. 올해 봄 어머니는 필기시험에 여덟 번 실패한 뒤 운전면허 따는 일을 포기했다. 아마 현중과 형준을
구별하는 일마저 포기하면 그때부터는 노년의 인생에서 점점 더 많은 일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3) 노년의 인생은 자신의 노쇠를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여유를 배우는 것이라는 두 시간짜리 강연을 듣고 온 뒤로 어머니는 더 이상 노인복지회관에 나가지 않았다.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많은 걸 포기해야
했음에도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체념과 거기 대한 강요였다. 사실 체념이라고는 해도 어머니 스스로 선택한 적은 별로 없었다. 갓 태어난 나를
처음 품에 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Group 2
4) 미소년들의 프로그램이 끝나자 텔레비전 앞에서 물러나
앉으며 어머니가 물었다. 몇 키로나 뺄 거니? 내가 20킬로그램이라고 대답하자 또 한번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 만나러 갈 일 있나? 방으로 들어가는
내 등 뒤에 대고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는 어머니의 잔소리와 달리 나는 어머니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5) 지금까지 다이어트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라는 걸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은 뚱뚱한 사람을 단순히 둔감하고 무신경하게 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으르고 절제심이 없으며 자기 관리를 하지 않는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맞선을 보았던 수많은 여자들은 물론 어머니조차 한번쯤은 나의 성적인
기능이 시원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B는 내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체중을 톤 단위로 계산하라고
농담하곤 했다. 100보다는 0.1이란 숫자가 뭔가 갈망이 있고 이미지도 정교하잖아. 솔직히 다소의 묵직함마저 없었다면 넌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평범할 뻔했어. 그러나 묵직하다는 B의 말이 사실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그 정도 이유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고, 아니면 평범하다는 그의 말이 사실과
달라서 그랬는지 집단적 가치에 의해 떠밀려가는 건 특히 싫어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다.
6) 그날 오후 나는 버스를 타고 광화문의 대형 서점에
나갔다. 두 시간 동안 열댓 종류의 다이어트 책을 꼼꼼하게 훑어본 다음 이론적으로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책을 세 권 샀다. 토요일에 쉬는
대신 일요일에 출근하는 B의 회사가 10분 거리에 있었다. B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책을 사러 나왔다고 하자 내가 두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서점에서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B가 온 것은 두 시간 뒤였다. 신문사 기자란 술꾼 남편과 비슷해서 늘 늦게 온 핑계를 지나치게
조리 있게 말하고 그 뒤에는 때려치워야겠다는 소리를 잊지 않고 덧붙인다. 그러는 동안 어느 틈에 내 옆자리에 놓인 책의 제목을 읽은 것은 물론
머릿속으로는 그날 화제의 ‘야마’까지 정리한다.
Group 3
7) B에 따르면 이제부터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듯했다. 막 닫히려는 만원 엘리베이터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가 한쪽 발을 들이밀려는 순간 그 안에서 누군가 닫힘 버튼을 눌러버리는 모욕은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었다. 신발 끈을 맬 때마다 변기에 앉았을 때처럼 얼굴이 빨개지며 또 힘을 너무 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방귀가 나와버릴까
봐 걱정하는 일에서도 해방이었다. 뚱뚱한 사람은 인상이 비슷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간혹 엄청나게 못생기고 지저분한 뚱보에게 내가 주문한 음식을 날라다주는
식당 아줌마를 큰소리로 불러 세울 수밖에 없는데 그때마다 구겨진 자존심을 내색하지 않아야 하는 고통도 없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 너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네 살덩이로 포장된 꾸러미를 벗기고 비로소 그 속의 내용물, 즉 네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야. B는 자기 중고차의
머플러가 나간 것을 순전히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탈 때마다 차 바닥이 내려앉아서 과속 방지 턱을 겨우 넘는다는 건 너도 알지? 이제부터는
비행기라든가 유람선, 그리고 놀이기구, 뭐든 탈 때마다 그게 네 쪽으로 기울어질까 봐 옆 사람 눈치 안 봐도 돼. 마지막으로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을 때 B가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살 뺄 생각 같은 걸 한 거야? 여자랑 자려고?
8) 얼마 전 고등학교 때의 단짝들이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였다. 회사의 법인 카드로 강남의 물 좋다는 곳을 골라 다니며 원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긴다는 친구가 있었다. 유부남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그 친구의 허풍을 받아넘기고 있었지만 미혼들은 점점 몸이 그쪽으로 기울었다. 화려한 공금 유용 여성 편력기가 끝나자 구석에서 누군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실은 여자랑 자본 지 11개월 3주 이틀 됐어. 뭐라구? 설마! 마치 아르바이트 방청객으로 채워진 텔레비전 토크쇼의 방청석에서처럼
사방에서 동시에 과장된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때 나는 그 친구보다 2년쯤 더 됐다는 말을 돌아가는 길에 B에게만 했던 것이다. 11개월 3주 이틀이라니,
하루 단위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 날마다 세어봤다는 뜻 아니겠냐는 의미로 장난삼아 꺼낸 얘기였는데 B는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그건 솔직히, 다이어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B가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문제는 적극성이라고. 너 한 번이라도 여자한테 접근해서 먼저 말 걸어본 적 있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B는 아직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나는 무엇을 간절히 원하기 이전에 내가 그것을 원해도 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조건에서
살아왔을 뿐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B가 굳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단지 여자랑 자기 위해서라면 다이어트까지 하지 않고도
손쉬운 해결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모를 만큼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9) 술집에서 나오자 그사이 어둠이 내려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건강하시지? 대리 운전 기사를 부른 뒤 B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배웅했다. 식당 넘겨버린 뒤로 심심하다고는 안 하셔? 편하지, 뭐.
국밥 먹으러 가끔 가시는 것 같더라. 새 주인이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비슷하게 맛을 낸대. 사실 그것은 핑계였다. 한자리에서 20년이니 국밥과
국밥집 모두 지겨울 대로 지겨울 테지만 어머니는 거기 말고는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지금도 그 교회 다니시니? 아니. 순복음교회로 옮기셨어. 나는
B에게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강남 사모님들이 금붕어 같은 입놀림으로 고상하게 찬송가 부르는 모습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던 어머니는 목청껏 소리
지르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싶다며 교회를 옮겼던 것이다. 네 어머니 언제 봐도 씩씩하셔. B가 재미있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Group 4
10) 일요일 저녁 버스 안은 한산했다. 빈 옆자리에
책을 내려놓는데 B의 말이 떠올랐다. 버스 좌석에 앉을 때마다 옆 사람의 몸이 닿을까 봐 늘 신경이 쓰였던 건 사실이었다. 젊은 여성의 오해를
견디지 못해 중간에 버스를 내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B는 매사에 쓸데없이 복잡하고 예민한 나와 달랐다. 좋은 환경에서
귀하게 자란 아들답게 악의 없이 명쾌했다. 어릴 때의 그를 본 적은 없지만 영민하고 순진해 보이는 소년이었을 것이다.
11) 차창으로 천천히 얼굴을 가져갔다. 밖의 거리는
평소보다 약간 어두웠다. 차가 적어서인지 텅 빈 검은 도로에 불빛이 군데군데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어머니는 늘 삶이 재미없었고 변화를 원했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니는 교회 정도였다. 씩씩한 사람은 전혀 못 되었다. 만약 그 전화를 어머니가 받았다면 일단은
번호가 틀렸으며 찾는 사람 역시 이곳에 살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이 떨려 점심은 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슨
전화냐고 묻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이불을 둘러쓰며 돌아누워 버렸을 것이다.
12) 그전화는 일주일 전 어머니가 교회에 간 오전
시간에 걸려왔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국밥집을 통해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며 내가 그 집 아들 같은데 맞느냐고 물었다. 그런 다음 아버지의
이름을 댔고 병원과 병실 호수를 알려주었다. 짧은 통화였다. 내가 병명과 수술날짜를 알게 된 것은 그 병원의 친절한 당직 간호사를 통해서였다.
가족 분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나는 내게 전화를 걸었던 젊은 남자처럼 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날 이후 한 주일이 지나도록 내가 한 일이라곤
국밥집에 전화를 걸어서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면 어머니가 곤란해질 일이 있으며, 어머니에게는 누군가 번호를 물어봤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 것뿐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려 해봤지만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대신 뭔가 슬픈 생각에 빠져 있다가 아버지를 놓칠세라 종종걸음을
치는 뚱뚱한 소년이 떠오르곤 했다.
4.
일용할 양식 (Wed May 23)
Group 1
1) 심장내과 전문의인 A 박사는 월남전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사체 부검을 하다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내장에 지방 덩어리가 두텁게 달라붙어 있었다. 육식을 즐기고 운동량이 적은 노인에게나 나타나는
지방질 퇴적이 어떻게 해서 전장의 젊은 군인들에게 발생한 것일까. 바로 주식인 탄수화물 때문이었다. 인간의 몸은 거대한 화학 공장이다. 몸속에서
남아도는 탄수화물은 지방으로 바뀌고, 반면 지방은 아무리 많이 섭취해도 탄수화물 없이는 저장되지 않는다. 거기에서 지방은 마음대로 먹고 탄수화물을
금지하는 ‘A다이어트’의 이론이 나왔다.
2) 이십여 년간 국밥집을 꾸려온 어머니의 이론은 당연히
정반대였다. 삼겹살을 먹어서 살을 뺀다고 하자 어머니는 그럼 그 기름이 다 어디로 가겠냐고 어이없어 했다. 음식이 몸속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성분이
된다고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밥과 빵과 국수와 떡 같은 탄수화물을 전혀 먹지 않겠다는 말에는 특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밥이야말로 조상
대대로 먹어온 신토불이 건강식이며, 국수는 열량이 밥의 절반이고 게다가 메밀국수는 널리 알려진 다이어트 식품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머니는
텔레비전 아침 방송을 거의 빼놓지 않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과일이나 주스도 먹으면 안 된다는 대목에서는 즉시 무가당도 말이냐? 라는 반문이 돌아왔다.
과일 자체에 당분이 많잖아요. 그리고 감자도 사지 마세요. 전분은 곧바로 탄수화물로 분해돼요. 어머니의 눈썹이 자신 있게 치켜 올려졌다. 너,
감자처럼 영양가 높은 음식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알고 있어요. 어머니에게 뭔가 설명한다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지 않은 나는 말문을 막듯이 재빨리
대답했다. 설탕과 감자가 인류의 역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지금은 싼값으로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는
영양 결핍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꾸로 체형 관리와 다이어트에 쏟아 붓는 돈이 미국만 해도 1년에 몇 십억 달러를 넘는 시대이다.
3) 인터넷으로 주문한 체중계가 다음 날 도착했다.
남들이 생각하듯 뚱뚱한 사람의 불편은 계단을 올라가기 힘들다거나 식비가 많이 드는 데에만 있지 않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훨씬 더 불편하다. 독신자가 마음 놓고 리얼 돌(real doll)을 구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뚱뚱한 사람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빅 사이즈의 옷이나 체중계 같은 걸 고를 수 있다는 것은 인터넷 쇼핑의 중요한 장점이었다.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가져보는 체중계 위에 서서
검은 숫자 위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바늘을 내려다보았다.
퇴근길에 버스 정류장 옆 문방구에서 청색 줄이 쳐진 작은 스프링 수첩을
샀다. 수첩은 피복을 입힌 고무줄로 봉하게 돼 있었고 총 50장이었다. 42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찢어낸 뒤, 굵은
펜으로 한 장에 하루씩 날짜를 적어 넣었다. 준비는 대강 끝난 셈이었다.
5.
첫 2주일
Group 2
4) 눈 뜨자마자 체중을 기록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
되었다.
아침은 달걀이나 두부에 야채를 먹었다. 온갖
조리법을 바꿔가야만 물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야채 역시 토마토와 오이, 피망 따위를 번갈아 먹었다. 저녁에는 고기와 생선이었다. 하루는 삼겹살
구이를, 다음날은 생선회를, 그리고 생선 구이, 베이컨 구이, 닭백숙, 등심 구이 이런 식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번듯한 메뉴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같은 음식을 매일같이 반복해 먹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 모두를 밥 없이 먹는 일이 특히 고역이었다. 지금까지는 반찬에 의해
메뉴를 결정했고 밥은 저절로 따라나오는 것으로 여겨왔다. 이제는 전혀 달랐다. 식욕은 오직 밥을 원했고 기름기가 도는 따뜻한 밥 생각만으로도 몸이
정신없이 흥분했다. 그것은 입맛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방은 탄수화물과 함께 섭취해야만 저장이 된다. 그러므로 내 몸속의 본능이 탄수화물을 향해
갖은 구애와 절규를 하는 것이었다.
5) 점심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밥에는 손도 안 대고
반찬만 먹고 나오는 나는 식당 주인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내가 먹고 난 만두 접시에는 만두소를 뺀 나머지 만두피가 고스란히 벗겨져 남아 있었다.
비빔밥을 먹을 때에는 먼저 설탕이 섞인 찹쌀 고추장을 완전히 걷어낸 뒤 밥 위에 얹힌 나물만을 조심스럽게 덜어내 씹었다.
회사 동료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그들은 내가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 사실과
내가 선택한 다이어트 방법의 이해할 수 없는 측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을
때 벌어질 만한 참담한 현상에 대한 각종 상식을 식사가 끝날 때까지 화제로 삼았다. 입사 동기인 한 친구는 나와의 친분을 핑계로 다이어트의 부작용과
요요현상에 대해 가장 신랄한 논리를 펼쳤다. 그중 말이 없는 것이 신입 여직원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오가는 얘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조용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두가 겉으로는 격려였다. 그러나 남의 일이란 어차피 상투적인 호기심일 뿐이었으므로 그 대상이 된다는
건 유쾌한 일이 못 되었다. 나는 점점 혼자 식당에 가게 되었다. 저녁 약속 같은 건 모조리 6주 뒤로 미뤄놓았다.
6) 사흘째부터 몸에 변화가 왔다. 빈혈 증세 같은
어지러움이 찾아왔고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의자가 눈에 띄면 잠깐이라도 가서 주저앉기 일쑤였다. 매사에 의욕이 사라지면서 매일 해오던 회사
일조차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난간을 짚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나를 뒤따라오던 신입 여직원이 보다 못해 대신 서류 파일을 들어줄 정도였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해요. 남의 관심을 끄는 것 자체가 싫었지만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내 머리통을 가리켜 보였다. 뇌가 분노하는
거야. 네? 뇌가 왜요? 더 이상 설명할 기력이 없었으므로 순진한 듯 크게 뜬 그녀의 눈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몸에서 최고로 신분이 높은
뇌는 잡다한 노동을 하지 않는다. 에너지를 직접 만들어서 쓰지 않고 탄수화물로부터 정제된 포도당을 공급받는데 지금 그것이 전혀 공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A박사는 뇌의 요구를 따르지 말라고 충고했다. 시간이 지나면 뇌 역시 새로운 체제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분간이라도 뇌에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어느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Group 3
7) 어머니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닷새째 되는
날 저녁 식탁에 삼계탕이 올라와 있었다. 닭고기는 괜찮잖아? 닭의 뱃속에 숨겨놓은 찹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 어머니의 말투는 천연덕스러웠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소한 밥 냄새와 함께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는 삼계탕을 하염없이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고기는 괜찮지만 고기를
먹은 뒤 냉면 혹은 된장찌개에 밥을 먹는 순간 살이 찌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여간해서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대신 입 안에서는 재빨리
침이 분비되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내 몸은 벌써 냅킨을 두르고 두 손에 칼과 포크를 들고 앉아서 어서 서두르라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곡기가 들어가야 힘을 쓰는 법이야.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어머니가 강력한 유혹의 말을 던졌다. 그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사기 주발 위에 봉분처럼 올라와
있는 머슴의 고봉밥을 떠올려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곡물은 설탕 다음으로 손쉽게 에너지가 된다. 그러나 창고에 남아도는 재고를 다 써버려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곡기를 새로 들여놓아서는 절대 안 되었다.
8) 참치 캔과 두부로 저녁을 해결한 뒤 한껏 입 안이
텁텁해져 있는 순간에 어머니가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을 띄운 향기로운 꿀물을 담아 내왔다. 다른 거 다 소용없어. 몸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건강
비결이야. 꿀물 못지않게 달콤하기만 한 그 말 역시 맞는 말이었다. 몸은 늘 야구 감독처럼 우리에게 각종 신호를 보내 생존이라는 경기를 컨트롤한다.
문제는 지방에 있어서만은 몸이 원하는 만족과 내가 원하는 건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뇌로 말하자면 더욱더 내 편이 아니었다. 자신이 쓸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다른 기관이 고생을 하든 말든 뱃속 내장에 포도당을 잔뜩 쌓아놓으라고 명령하는 게 뇌였다. 더 많이 쌓아놓는 데 혈안이 되어 위가
다 찬 다음에도 3분이 지나서야 뇌는 그것을 몸에 전달한다. 꿀물을 향해 가까스로 손을 내젓는 순간에도 나는 동시에 몸속에서 맨발로 뛰쳐나와 꿀물
잔을 잡아당기는 누군가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느낄 수 있었다.
9) 그 다음 날 저녁 메뉴로는 내가 주문한 대로 고등어
구이와 두부 부침이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주문하지 않은 기름진 쌀밥과 소면을 얹은 낙지볶음도 함께였다. 모두 아주 적은 양이었다. 어머니는 편식은
세상이 다 아는 나쁜 습관이라는 꾸짖음과 함께, 텔레비전 아침 방송에서 권하는 대로 골고루 먹되 양을 절반으로 줄이는 반식(半食)을 하라고 명령했다.
내가 전혀 그 말을 따르지 않자 다음 날부터는 다시 작전을 바꾸었다. 고기에 소금 후추 외에 단내가 풍기는 불고기 양념을 하는가 하면 닭매운탕이나
오징어 볶음에도 탄수화물 덩어리인 설탕을 넣어 조리하는 것이었다. 유혹을 이기기 어려울수록 어머니에 대한 나의 불만은 커져갔다. 마침내는 식탁에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식에 관한 것이건 또는 다른 무엇에건 시대에 뒤떨어진 낡아빠진
믿음 따위는 버리라고 소리치는 정도였다. 제발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만이라도 어머니와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짜증은 점점 신경질적인 비난이 되어갔다. 이 다이어트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는 결혼은 절대 하지 못할 테니, 뚱뚱할 것이 분명한 자식 따위도 남기지 않을 거라고 차갑게 내뱉기도 했다. 어머니가 아무 희망도 없이 사는
것은 한때 부도덕했던 대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보복이라는 듯이 말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상처 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처 주는 자를 멸시하는 어머니의 관록 또한 만만찮았다. 나마저도 어머니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보아 뱀이 코끼리를 삼키듯 도로 나를 뱃속에
집어넣기라도 할 기세로, 내가 비참하게 버려진 무력한 태아였을 당시 나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권능과 희생적인 선택을 환기시켰다. 왜 날 낳았어요?
어쩌다 저런 놈이 생겨나 가지고! 어머니와 내가 닭과 달걀이었다면 그런 말로 서로 으르렁댔을 것이다.
Group 4
10) 다이어트가 어려운 것은 몸속에 장착된 수백만
년이나 된 생존 본능 시스템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철저히 지방을 모아 저장하는 돌도끼 시대의 시스템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미와 건강의 기준은 몸속의 지방을 남김없이 태워 없애는 것이다. 다이어트는 원시적 육체와 현대적 문화 사이의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딜레마는
나의 일상 전반에서 다양한 시련으로 닥쳐왔다. 어느 날은 자료실에 다녀와 보니 내 책상 위에 종이 접시가 한 개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달콤한
생크림으로 덮인 무스케이크 한 조각이 빨간 딸기를 머금고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옆에는 콜라도 한 잔 곁들여져 있었다. 벌써 입가에 하얀 생크림을
묻힌 채 포크를 흔들며 입사 동기가 오늘이 신입 여직원의 생일이라고 알려주었다. 내기라도 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동료들 모두 나와 케이크 접시를
주목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 것까지 먹어. 나는 케이크 접시를 옆자리에
있는 입사 동기의 책상 위로 옮겨놓았다. 콜라 컵까지 마저 갖다주는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입사 동기가 마치 퀴즈를 내듯이 물었다. 콜라는
왜 몸에 나쁜 건데? 농축된 당분은 지방이랑 같이 먹었을 때 저장의 위력을 발휘하거든. 나는 천천히 그리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나쁜 게 왜 그렇게
입맛에 딱 맞는 거냐면, 네 몸이 지방이라면 눈이 뒤집히는 2백만 년 전 원시인의 몸이라서 그래.
11) 나는 내 몸속 타자(他者)를 원시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살아남으려는 동물적인 본능과 거기에 집착하는 내 몸의 시스템에 점점 적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은 더 이상 종족 보존을 위해 섹스하지
않는다. 나의 태어남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 몸의 시스템은 내가 아직도 빙하기 인간과 다를 게 없는 동물적 존재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종족 보존 본능에 저항한 쾌락적 인간이 왜 지방을 저장하는 본능의 쾌락에는 굴복하는가. 쾌락을 얻는 것만이 인간의 우성 인자이기
때문인가.
12) 몸무게는 매일 조금씩 줄어갔다. 전날과 똑같은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조차 몸이 가벼워진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손목시계가 헐렁해졌고 허리띠의 구멍을 세 개나 안쪽으로 옮겼다. 와이셔츠
목단추를 잠그던 나는 목의 살이 가장 먼저 빠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보면 어쩐지 거울 속의 빈 공간이 많아진 듯이
생각되었고, 좁은 복도에서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시험 삼아 몸을 조금만 틀어보았는데도 벽에 닿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택시 잡기가
쉬워진 것도 나를 태우기 싫어하는 운전기사가 줄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내가 뭔가를 지시할 때마다 그전까지는 굼뜨기만 하던 신입 여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대답하는 횟수 역시 늘었다. 8킬로그램이 빠졌을 때 나는 이 다이어트야말로 동물로서의 자연 선택을 버리고 문명적 선택 단계로
접어든 현생 인류의 새로운 존재 증명임을 확신했다. 무엇보다 유전자 전달 시스템에 반항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만족시켰다. 그러는 사이 3주일이
지나 있었다.
6.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May 31)
Group 1
1) 점심시간에 B가 회사로 찾아왔다. 탄수화물만 안
먹으면 된다고?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은데? 그러나 B와 나는 계속해서 수많은 식당을 지나쳐가야 했다. 설렁탕이나 해장국, 초밥, 볶음밥, 카레라이스는
밥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간단히 먹는 점심 메뉴인 냉면과 우동도 탄수화물 덩어리였다. 파스타도 마찬가지였다. B가 중국 음식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고기는 상관없다며? 응, 근데 중국 음식에는 거의 다 전분이 들어가거든. 보도 위에 선 채로 식당 간판을 두리번거리던
B의 시선이 별 희망 없이 건너편 샌드위치 가게에 머물렀다. 당연히 안 되겠지? 빵도 빵이지만 마요네즈에 설탕 들었잖아. 네가 뭘 먹든 말든,
난 그냥 끼니나 때워야겠어. 식욕을 잃었다고 투덜대며 결국 B는 가장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2) B는 치킨과 콜라와 비스킷을, 나는 소스를 뺀
햄버거를 주문했다. 그렇게 계속 밥을 안 먹으면 영양 불균형 아닐까? 하긴 다이어트 원리라는 게 한 가지만 줄창 먹어서 영양실조가 되어 살이 빠지는
거 아니겠어? 나는 몇 주일째 내게 말을 거는 모든 사람이 다이어트 방법에 대해 물어왔으므로 약간 지겨운 생각이 들었지만 다이어트는 칼로리보다
대사의 문제라고 설명해주었다. 사자는 고기만 먹지만 몸 안에서 탄수화물이 합성되므로 영양의 균형에는 문제가 없다. 반면 소는 풀만 먹지만 몸속에
기름진 부위를 많이 갖고 있다. 낙타 주머니에는 기름이 들었지만 지방이 연소되면 물이 되기 때문에 그걸로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거다, 등등.
B가 피식 웃었다. 거의 자동이구나. 채널은 고정이고.
3) 주문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는 듯 혼자 앉은 건너편
자리의 꼬마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패스트푸드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뚱뚱한 사람이 나타나는 즉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맥도날드
소송을 떠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이 무얼 먹는지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데다가 특히 어린애가 많기 때문이다. 어린애들은 솔직해서 눈에 띄는
점이 있으면 그것을 빤히 바라보기 마련인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천진함에 대한 아이들의 권리만 인정할 뿐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 않은 타인의 자존심에
대해서는 교육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샐러드만 먹고 있으면 부모들은 아이에게 속삭일 것이다. 뚱뚱해서 저렇게 조금만 먹어야 하는 거야. 저렇게
적게 먹는데도 뚱뚱하다니, 저 아저씨 불쌍하지. 그렇다고 감자튀김에 더블 사이즈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있다고 해서 몸집에 걸맞다고 자연스럽게 보아
넘기는 것도 아니다. 저런 식으로 먹으니까 뚱뚱해지지, 라는 눈빛을 서로 교환하며 웃음을 참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이다.
뚱뚱한 사람은 몸집이 커서 눈에 잘 띄는 게 아니다. 뭔가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에 시선이 멈추는 것이다. 건너편의 꼬마는 내가 햄버거를
열어 내용물만 먹고 빵을 쟁반에 던져버리는 것을 빤히 보고 있었다.
Group 2
4) B가 치킨을 가리켰다. 한 개 먹어보지? 기름기는
먹어도 된다고 했잖아. 다 벗은 닭은 괜찮은데 보아하니 걔는 싸구려 옷을 입은 채로 기름에 뛰어든 것 같은데. B가 씁쓸한 표정으로 눈썹을 한
번 치켜올렸다. 고생이 많구나. 응, 겨울 동안 잠만 푹 자고 나면 살이 다 빠져 있는 곰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자고 나면 살이 빠진다고?
곰도 지방 흡입 수술을 한다는 건 처음 알았네. 그러게, 돈도 많아. 그러나 B는 평소처럼 농담을 즐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B가 무심히 흔들고
있는 콜라 잔 안에서 얼음이 절그럭절그럭 소리를 냈다. 왜 인간이 과식을 하는 줄 알아? 내가 화제를 돌렸다.
빙하기의 선조는 주기적으로 굶었다. 사냥할
동물도 채집할 식물도 없는 시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숫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랜 기다림 끝에 먹을 것을 만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잔치를
벌이고 과식을 했다. 잔치는 지방질을 저장하는 것이었고 지방질을 저장하는 것은 다음번 추위와 가뭄, 궁핍기에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일주일만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도 팔다리가 발육을 멈춘다. 선사 시대 인간의 뼈와 이빨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굶주림으로 발육이 정지되었던
부분과 뒤이어 한바탕 잔뜩 먹어 활발히 발육했던 부분의 밀도 차가 확연하다. 단순히 먹는 능력만이 아니라 과식하는 것도 살아남는 능력에 해당했다.
그러므로 지방을 충분히 비축한 뚱뚱한 사람도 주기적으로 배가 고파지고 음식이 맛있기만 한 것이다. 과식은 인간의 몸에 디자인된 유전적인 결함이다.
5) 그러니까 뭐든지 조상 탓만 하면 되는구나. B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를 뜯어보듯 빤히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건너편 꼬마와 꼭 닮아 있었다. B가 뚱뚱한 사람을 보듯이 나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내가 내 몸속 뚱보를 의식하고 대결하는 동안은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만다고 말하는 듯했다. 계속해서 낯선 사람 같은
표정으로 B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잘못된 상태로 태어났으니 네 잘못은 없다는 거 아냐, 그렇지?
나는 말없이 쟁반에 빈 콜라 잔과 더러워진 냅킨 등을 담았다. B가 다시 말했다. 네가 원시인라고 부르는 놈을 상당히 혐오하는 것 같은데, 네 속에서 지방을 내놓으라고 우는 놈은 네가
아니냐? 너는 너라는 존재를 이끄는 대단히 이성적인 주체이고, 그놈은 너한테 기생하는 식객 같은 미개인이라고? 무슨 말씀. 그놈은 네가 몸이라는
지금의 껍질을 갖기 이전부터 존재했어. 그놈이 바로 너야. 안 그래? 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영민하고 순진한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심술궂거나 아둔해 보이는 뚱뚱한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공차기를 하지 않고 교실 창밖으로 그애들을 바라보며 양손에 쥔 초콜릿을 탐욕스럽게
핥아대는 이유를. 입가를 더럽히는 그 단맛의 자극적인 적의와 쾌감을. 제기랄, 내 몸속의 유전자가 누구의 것이든 무슨 상관인가.
7.
밥상
6)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돌아와 삼겹살에 소주 반병을
마셨다. A박사의 조언에 따라 평소 즐기던 맥주가 아닌 소주를 선택한 것이었다. 나머지 반병은 어머니가 마셨다. 내가 앉은 식탁 의자 등 뒤로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눈으로는 연신 화면 속의 현중이와 형준이를 좇으며 어머니가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왜 그렇게 살 빼는 데 열심이야?
무슨 일 있지? 나는 전기 프라이팬 위에서 기름 튀는 소리를 내며 익고 있는 삼겹살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살코기를 떼어가고 남겨놓은 기름 부위에서
유난히 크게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 소주 한 잔을 따라 손에 든 채 나는 습관처럼 어머니 등 뒤의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수술 날짜에서 이미 2주일이 지나 있었으므로
퇴원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환자는 아직도 병실에 있었고 2차 수술 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병세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거기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간호사한테조차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환자가 나를 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을 감추려다
보니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그의 육체가 겪을 고통에 대해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덤덤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마음 아프게 받아들이기엔
마치 피를 탁하게 만드는 찌꺼기 지방처럼 우리 사이에 무정한 세월이 너무 많이 쌓였다.
Group 3
7) 내가 식탁 한쪽에 놓인 수첩을 열어 날짜를 확인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새된 목소리를 냈다. 얘, 네 덩치가 이제 테레비 화면을 다 가리지 않는구나. 오늘은 현중이 혼자만 나온 거 맞지? 나는
나머지 화면이 보이도록 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어머니는 술이 좀 올랐을 때에는 농담을 곧잘 했다. 화면에서는 미소년들이 게임의 벌칙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고추냉이가 든 떡을 먹고 있었다. 사람이 이쁘면 먹는 것도 이쁘구나. 어머니가 혼잣말로 하는 대화를 시작했다. 늙으면 먹는 모습이 추해진다는
말이 있어. 어느 누가 추한 걸 자꾸 보려고 하겠니. 먹을 것을 뺏어야 할 때가 온 거지. 죽을 때가 된 거야. 사람이 정을 뗄 때도 그런다더라.
정이 식으면 먹는 모습이 제일 보기 싫어진단다. 먹을 것을 뺏고 싶은 심정, 그거 죽으라는 소리 아니겠냐. 먹는 것만큼 치사한 것도 없어. 좋아지는
마음도 다 먹을 때에 생겨나고 살가운 정도 한 밥상에서 나오는 거란다. 먹는 게 이쁘면 곧 돼지가 되겠네. 내가 비아냥댔다.
8) 프라이팬의 기름을 닦던 손길을 멈추고 어머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 나가서 소주 한 병 더 사와라. 살 뺀다면서 운동은 안 하니. 밥만 무슨 불구대천 원수 보듯이 하지 말고. 갑자기
어머니는 기름이 묻은 종이 타월을 거칠게 내던지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술이 들어갈수록 어머니의 농담은 점점 트집 섞인 잔소리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신세타령으로 바뀌는 게 순서였다. 그럼 못 쓴다.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라고. 보릿고개를 생각해야지. 그 시절엔 말야. 굶지 않는다면
정말 무슨 일이건 다 했어. 우리 동네에 딸을 술집 내보내는 집이 몇 집이나 되었는 줄 아니. 어쨌든 지금은 그때가 아니잖아요. 내가 말을 끊었다.
이제 굶어 죽는 시절이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어머니도. 어머니가 노려보는 바람에 나는 그 다음 말을 입속에 삼켰다. 어머니는 내가 입을 다문 뒤까지도
계속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왜요? 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어머니는, 아니다.
누굴 닮은 것 같아서, 라며 기운 없이 웃었다.
8.
마지막 주
9) 몸이 지방 합성에서 지방 분해 단계로 완전히 접어든
듯했다. 평소의 생활 리듬을 되찾았고 이제 체형의 변화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의 놀란 눈에서도 확연히 나타났다. 오랜만에 들른 거래처 사람이 내게
몰라볼 뻔했다고 인사치레를 하면 그때마다 신입 여직원은 저희 팀장님 대단하시죠, 라고 나서서 참견을 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쌍꺼풀이
너무 또렷하고 멋있으세요, 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엉덩이가 작아졌다는 것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발자국도 훨씬 얕게 파이는
느낌이었다. 또 턱밑의 살이 빠져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거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거군. 거울 앞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Group 4
10) 입사 동기가 내 배의 변화를 축하해주었다. 자기는
산에 오를 때에도 어떻게든 나무나 바위를 붙잡으려고 하지 배에 힘을 안 주려고 하는데 그것이 뱃살과 관계가 있냐고 물어오기까지 했다. 나는 몸이
마지막까지 사수하는 지방 저장고가 배이기 때문에 뱃살은 맨 나중에 빠진다고 설명해주었다. 신입 여직원은 단 음식이 왜 살찌는지 질문했다. 몸이
가장 쉽게 에너지를 얻는 방법은 포도당 주사이다. 그 다음이 단 음식이다. 한 단계만 거치면 곧바로 포도당이 되기 때문에 피곤하면 몸은 으레 단것을
찾는다. 갓난아이 역시 단맛을 좋아하도록 타고난 덕분에 설탕이 함유된 엄마의 젖을 찾게 되고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것이다. 성장하느라 워낙 많은
열량을 필요로 하는 어린애도 단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노인이 단것에 탐닉하는 이유는 좀 다르다. 탕수육 한 그릇을 거의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어머니는 늙으면 어린애로 돌아간다는 말을 지혜로운 격언이나 되는 듯이 들먹이면서 탐식을 합리화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애와 달리 많은 열량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쇠약하고 교활해진 늙은 몸이 일을 하기 싫어해서 손쉽게 에너지를 얻으려고 하는 책략이다.
11) 내 몸의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뚱뚱한 사람은
몸집이 크다 보니 발이 불균형하게 작고 초라해 보이기 십상인데 뭐랄까, 이제 비로소 실루엣이 살아나는 느낌이라고 할까. 팔뚝과 등을 터질 듯이
팽팽하게 감싸고 있던 양복저고리도 훨씬 헐렁해졌다. 마침 백화점의 정기 세일 기간이었다. 나는 양복 두 벌과 화사한 색상의 봄 셔츠를 새로 샀다.
오랫동안 별러 왔던 외출 준비를 끝마친 듯 마음이 가벼웠다.
병원에 전화를 거는 것은 이번으로 세번째였다. 숫자를 누르는 손길이 약간 서두르고 있었다. 2차 수술은 실패였다. 변함없이 친절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그 병원의 장례식장으로
연락해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화기의 숫자를 눌렀다. 내일이 발인이었다.
12) 집에 들어와 나는 옷장에 새 양복을 걸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옷걸이에 걸려 있던 다른 옷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어깨를 약간 굽히고 있었으나 태도는 정중하고 당당했다.
새 물건다운 광택과 활기를 내뿜으며 마치 혁신적 프로젝트를 갖고 부임한 젊은 후계자라도 되는 듯이,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던 옷장 안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밀쳐내고 있었다. 나의 눈길이 맨 안쪽 구석에 걸려 있는 낡은 양복저고리에 가 멎었다. 새 양복과 달리 탄성이 없는 그것은 흐물흐물한
과거의 껍질처럼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등과 가슴이 만들어낸 커다란 공간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듯이 허전해 보였다. 나는 그것을 꺼내
양복솔로 천천히 먼지를 떨어냈다. 검은 양복은 그 옷뿐이었다. 부엌에서 저녁 식탁을 차리는 어머니의 혼잣말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주문한 식단에
대한 불평일 것이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난생처음이라고 할 만큼 고통스러운 슬픔을 느꼈다.
9.
잘못 태어난 아이들 (June 14)
Group 1
1) 사 춘기 때 B는 늘 자신이 실수로 태어난 아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우리 아버지한테 여관비 오천 원이 없거나 수술비 오만 원이 있거나 둘 중 하나였으면 난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B의
사연은 얘기할 때마다 바뀌었다. 사실 아버지가 엄마한테 수술비를 마련해주긴 했대. 그런데 엄마가 병원에 가려고 상가 앞을 지나가는데 쇼윈도에 너무나
마음에 드는 구슬 백이 있지 않았겠어. 엄마는 냉큼 수술비로 그 백을 사버렸어. 우리 엄마는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이런 식이거든. 안 그랬으면
내가 만들어지지도 않았겠지.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내가 태어났다니까. 난 구슬 백하고 경쟁해서 졌기 때문에 태어난 인생이야. B는 어떤 날은 구슬
백이 아니라 주름치마였다거나 진주 반지였다고 말을 바꿔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기의 태어남에 대해 그렇게 농담할 수 있는 B가 나는 부러웠다.
2) B의 진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우리가 서른을 넘겼을
즈음이었다. 실은 누나가 있었어. B네 집은 남매였고 세 살 위인 누나에 대해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그 누나가 아니라 1년쯤 차이가 나는 누나인데,
아무튼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죽었어도 누나는 누나니까. B의 아버지는 2대째 독자에다 장손이었다. 첫딸을 낳자마자 그날부터 벌써 아들을 낳으라는
집안 어른들의 압력이 시작되었다. 2년 만에 임신이 되었을 때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B의 할아버지는 항렬자를 따른 사내아이의
이름을 다섯 개나 지어두었다. 그러나 아이는 이번에도 딸이었다. B의 아버지가 퇴근해 들어오면 아내는 늘 갓난아이를 껴안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고 있었다. 아기가 백일이 지나 산후 조리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 어머니는 아기를 재워놓은 뒤 큰딸을 걸려서 옆집에 놀러갔다. 돌아와보니 엎드려
자던 갓난아기는 솜이불에 작은 코와 입을 묻은 채 죽어 있었다. B의 아버지가 특히 절망에 빠진 것은 그 전날 남몰래 정관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집안의 불합리한 가치관을 두번째 출산 이후 우울증에 빠진 아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딸을 키울 결심이었지 불안스럽게 외동이를 키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다시 병원을 찾아가자 의사는 몸 안에 남아 있는 정자
중에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있을 테니 확률은 낮지만 수정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죽은 아기를 땅에 묻자마자 부부는 침대에 들었다. 놀랍게도
다시 임신이 되었고 다음 해에 아이를 낳았다. 이번에는 아들이었다.
3) 자신을 유독 사랑하며 계집애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조부로부터 하마터면 큰일날 뻔한 일로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의 충격을 B는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길이 끊어진 아버지의 음낭
속에 사흘이나 살아 있다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한 무시무시하게 집요한 자기라는 정충에 대한 경악은 그나마 가장 나중에 왔다.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연약한 숨이 끊어짐으로써 집안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 갓난아기 누나. 의도했든 안 했든 결과적으로 살인을 공모한 인간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종족에의 본능과. 죽음을 재빨리 삶과 바꾸는 비정한 흥정 그 모든 것이 역겨웠다. 부모가 마치 성기를 노골적으로 새빨갛게 부풀려서 흔드는
암컷과 거기에 코를 벌름거리며 꽥꽥대고 쫓아다니는 수컷 침팬지 같았다. 과연 어머니는 아무런 고의 없이 이웃집에 그렇게 오래 지체했던 것일까.
모든 것에 의구심이 생겼지만 무엇보다 사춘기의 B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아버지의 욕망에 대한 환멸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갓난아이의 주검이 놓였던
이부자리에서 몇 번이고 교접의 쾌락에 몸을 떨 수 있었단 말인가. B는 자신의 태어남에 대해 농담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Group 2
4) 나는 그날 B의 마지막 말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삶은 그런 식으로 비루하게 이어지는 거고, 우리는 아버지들의 위선 속에 세상을 배우는
거잖아. 글쎄. 내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너하고 난 달라. 네 아버지는 너를 얻기 위해 잠시 커튼 뒤로 들어갔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를 원한 적이
없어.
10.
비너스
빈소에 들어가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입구에서
형식적으로 부의금을 전하고 마침 들이닥친 다른 조문객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복도로 나왔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앳된 청년이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안내를 받아 북적거리는 식당으로 들어가야 했다. 나는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에게
호기심을 나낄 장소가 아니기도 하지만 이제 내가 눈에 뙬 만큼 뚱뚱하지 않은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입구에 앉았다 곧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장내
정리에 책임이 있는 청년은 죄송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달라고 당부했다. 구석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상에 놓인 술병과 음식들을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5) 머리에 횐 핀을 꽂은 차림의 중년 여인이 쟁반에
국밥을 받쳐 들고 왔다. 그릇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친근한 눈인사를
건네는데 받쳐 들고 왔다. 그릇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친근한 눈인사를 건네는데 횐자위가 붉게 충혈돼 있었다. 망자의 친척인 모양이었다. 국밥 한
그릇 드세요. 따뜻할 거예요. 매콤한 냄새가 코를 찌르면서 기름진 붉은 국물 속에 뜬 하얀 밥알이 벌써부터 나를 자극했다. 그러나 숟가락을 드는
대신 나는 슬픔에 잠긴 인상 좋은 여인이 무안하지 않도록 얼른 소주병을 들어 땄다. 조문객이 계속 들어오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불편했으므로
나는 계속 소주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국밥은 금방 식었다.
내 앞자리만 비어 있을 뿐 거의 자리가 찼다. 공교롭게도 친척들의 케이블인 모양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게는 친척이 거의 없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가족들이
모여 앉아 듣기 싫은 충고를 해대는 친정 나들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망자의 친척들은 오랜만이라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잠깐 눈물짓고 그 다음부터는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며 큰 소리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늘 아버지 세계의 사람들을 상상하곤 했다. 어른들은 모두 품위 있고 다정하며
아이들은 순진하고 영민할 것이다. 그러나 망자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내가 흔히 보아오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세월의 주름 속에 희비를 담고
있었으며 사는 데 지쳐 보이기도 했고 작은 일에 위안을 얻거나 허세를 부리는, 보통의 삶을 끌고 가는 모습이었다. 뚱뚱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눈길을 돌리지 않는 데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했고 나는 그들을 알지 못 했다.
6) 어머, 왜 밥을 안 드셨어요. 다 식었네. 조금
전의 여인이 와서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굳이 국밥을 새것으로 바꿔왔다. 친척들이 던지는 말로 미루어 여인은 망자의 누이가 분명했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가 내게 술잔을 권했다. 저,제가 누구신지 몰라서…… . 나는 대답 대신 얼른 잔을 비워 남자에게 돌려주며 그만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국맙을 가리켰다. 괜찮습니다. 좀 들어보세요. 남자가 고집스럽게
권하는 것은 지인들이 모이는 상가 같은 장소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숨을 마시는 사람은 어딘지 사연이 있어 보이게 마련인 데다 누가 보기에도
내가 술을 빨리 마시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손에 숨가락까지 쥐여주는 남자의 허물없는 강요를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 나는 마침내 국맙을 먹기
시작했다.
Group 3
7) 밥알은 달게 씹혀 목구멍 안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내 몸이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장이 춤추듯 꿈틀거렸으며 뱃속이 흐뭇할 만큼 따뜻해졌다. 자, 네가 그토록 원하는 탄수화물이다.
숟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이상한 감동으로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굶주린 자식을 먹이는 아비의 마음을 넘어 고통받아온 몸을 구원하는 메시아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자포자기, 그리고 자기 파과적이며 충동적인 악의가 팔에 속도를 붙였다. 잔칫집의 초대받지 않은 식객답게 입가로 국물까지
흘리면서 나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순식간에 국밥 그릇을 깡그리 비우고 말았다. 마지막 국물까지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자 마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상복 여인이 다가와 말했다. 한 그릇 더 드릴까요? 술을 워낙 많이 드시던데. 아마 낯선 취객이 상가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기를 바라는 데서
나온 친절이었을 테지만 나는 망자의 누이를 향해 네, 라고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흔쾌히 대답했다. 두 번째 국밥을 나는 후루룩 과장된 소리를
내며 지나치게 급히 먹기 시작했다.
8) 돌도끼 시대의 인간은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그악스럽게 지방을 저장한다. 인간의 몸은 지금처럼 지방이 남아도는 환경에까지는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진화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을 꼭대기까지 닿으면 굴러 떨어지게 돼 있는 바위인 줄 알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밀고 올라가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래. 서두르지 말자. 돌도끼를
뾰족하게 하는 기술 한 가지를 발견하는 데도 몇만 년이 걸렸는데 뭐.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지난을 당하거나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되거나 록설로 고립돼 굶주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인데 몸에 저장해둔 지방이 없으면 그런 재난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아직은 유효한
시스템인 셈이다. 하긴 몸처럼 정직하고 순종적인 기계도 없어.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한 달 정도 탄수화물을 안 주었더니 어쨌든 12킬로나
빠져주잖아. 내 의지를 따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긴 했지만 결국 내가 부리는 데 따라서 결과가 나오는 게 몸이야. 알고 보니 내 몸이 바로 내
거였어. 오케이. 밥이 들어간다고 몸속 원시인이 잔치를 벌이는군. 이런 식으로 국밥을 먹으면 몸은 순식간에 도로 지방을 쌓아놓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와 나는 평화롭고 정든 밥상 앞에 앉을 테지.
9) 내가 국밥 그릇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자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 너 셋째 아니냐? 어리둥절한 내게 그는 엉거주춤 영덩이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미국에서 언제 왔어? 갈수록 큰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
아닙니다. 나는 입가에 국물이 흘러내리는 채로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갑자기 그 자리의 모두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왔다. 금방이라도 토할 듯 속이 메스꺼웠다. 사람들을 밀치고 가까스로 복도로 나온
나는 나란히 붙어 있는 플라스틱 의자 중 한 개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열린 문 사이로 텅 빈 빈소가 눈에 들어왔다. 밥이라도 먹으러 갔는지 상주나
가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 희미하게 아버지의 영정이 보였다. 나는 약간 비틀거리며 분명 이제는 아주 늙어버렸을 아버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Group 4
10) 내가 늘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바라보았던 것은
다른 뭔가를 보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이 시시각각 눈앞에 떠오를 때마다 비너스는 그것을 차단시켜 나를 다른 문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탄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천공의 신 우라노스의 가장 어린 아들은 어머니의 음부 속에 있다가 거기 들어온 아버지의 성기를
반으로 잘라 바다에 던졌다. 바다에 떠다니던 아버지의 성기 주변으로는 하얀 거품이 모이고 이윽고 그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태어났다. 세상에
풍오와 그리고 아름다움을 가져다줄 아니었다. 마지막에는 언제는 닫힌문 앞에 서 있는 내 뒷모습이 남았다. 자신을 들여보내주지 않는 문 앞에선 뚱뚱한
소년은 옷걸이에 유일하게 남아 더욱 누추해 보이는 솜이 뭉쳐진 점퍼를 받아 들었고 밖에느 눈이 펄펄 내렸다.
11) 사춘기의 어느 날부터인가 종종 그 그림 뒤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모습이 있었다. 온몸 구석구석에 모피처럼 지방을 띠룩띠룩 두르고 코끼리 다리로 당당하게 서 있는 알몸의 여인. 그녀는 또 다른
여신. 빙하기의 비너스였다. 인류학자들은 당시에는 그런 살찐 여인이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여인은 오직 비너스를 만든 당시의 예술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빙하기의 예술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성을 상상했으며 그것은 바로 거룩한 밥의 모습이었다.
12) 검은 옷을 입은 꼬마 둘을 앞세우고 상주가 빈소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마치 기다리던 사람이기라도 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두 손을
뚱뚱한 아들들의 어깨에 한쪽씩 얹은 채 젊은 시절 아버지와 같은 품위 있는 눈빛으로 잠시 나를 바라다보았다. 그의 등 뒤를 아버지의 영정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그대로 뚜벅뚜벅 영정에 다가갔다. 내가 이탈리아 식당에서 지금깢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보았듯이 아버지 역시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아들을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뚱뚱한 아이의 기억을 갖고 떠나버렸다. 비너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 아버지에게 천천히 절을 한 뒤 나는 고개를 돌려 입속의 밥알을 뱉었다. 토할 것만 같은 메스꺼움이 또 한번
턱밀까지 치밀었다. 그때 상주가 조화 뒤의 벽에 기대놓았던 커다란 액자를 가져오더니 내게로 내밀었다. 액자는 집에서 포장한 듯 신문지로 꼼꼼히
싸여 있었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가로와 세로의 크기가 눈에 익었다. 나는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